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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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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닌 제국 === || [[파일:4KPALAIOLOGOS1.png|width=100%]] || ||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과 로마 재건 직후의 영토 || || [[파일:remnants-Byzantine-Empire-1265.webp|width=100%]] || || 1265년 제국의 영토. 외견상 이전의 동로마 제국을 그럭저럭 회복한 듯 보이나,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 하지만 제국을 재건한 이후가 문제였다.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1204년 이전의 강국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징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재건된 동로마 제국은 잘해봐야 발칸반도 및 아나톨리아 지역과 동지중해와 흑해 연안 일대에서나 영향력이 있을까 말까한 [[지역 강국]]이었고 다시 강대국으로 부활하려면 운과 실력(명군들의 통치)이 함께 따라주어야 될까말까였다. 그러나 새로이 황좌에 오른 미하일 8세는 예전의 강대국의 역할을 다시 떠맡으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적인 유럽-아시아 이중 전선도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제국은 예전처럼 이중 전선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다. 미하일 8세와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라틴 제국 [[작위 요구자|제위를 주장하는]] 앙주 가문을 비롯한 서유럽 각국들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그들에게는 유럽 문제가 가장 시급해 보였기 때문에 재건된 제국은 유럽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리스의 경쟁국들이 내부 투쟁으로 약해져 있었고, 슬라브 국가들인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무력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국의 무게 중심은 유럽으로 옮겨갔다. 특히 소산드라 쿠데타로 정통성 없이 즉위 한 뒤 라스카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요안니스 4세를 눈까지 뽑아 비참하게 유폐시킨 것에 대해 [[아르세니오스 분열]]이 일어났고 아나톨리아가 분노하면서 미하일 8세를 지지하지 않아 미하일 8세 입장에서는 더더욱 새로운 지지층 확보를 위해서라도 유럽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이 당시 즈음에 활동했던 사르디스의 안드로니코스 주교(Andronikos of Sardis)가 정작 우리가 아는 그 그리스는 발칸 반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칸 반도에서 아나톨리아로의 항해를 '''그리스(Hellas)'''로 귀환한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콘스탄티노플을 뺏긴 상태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 4차 십자군 계열의 정치체들, 동로마 계열이지만 지휘계통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여러 분국들이 난립해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발칸 반도 대신, 아나톨리아 지역이 확실히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이다.[* 'Transformations of Romanness'의 120p, 원문 'In a letter to the metropolit of Sardeis Andronikos, he goes so far as to '''refer to a voyage from the Balkans to his realm in Asia Minor as a return to Hellas'''', evidently because western Asia Minor was the heart of Greek rule and culture in his time.'] 이는 근본적으로 미하일 8세가 정통성 없이 소산드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것 때문이었는데 아나톨리아는 [[테오도로스 1세]]-[[요안니스 3세]]를 거치며 [[라스카리스 왕조]]의 영향력이 강력한 곳이었고 이러한 아나톨리아의 세력들이 어린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으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한 미하일 8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거기다 예산 마련을 위해 유대인들을 우대하는 행위나 동서교회 통합을 들먹이는 행위는 서구 세력에게 유대인 우대하면서 허세만 부리는 놈이라는 안좋은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카를루 1세가 이용한 명분 역시 이단을 징치한다였으니 서유럽에게 있어 미하일 8세 시기 동로마의 이미지는 징치해야 할 이단에 불과했던 것. 또한 저 들먹이고 있던 교회 통합은 종교계의 동의 없이 무작정 진행된지라 반감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방식도 교황에게 무릎꿇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밝혀져 종교계뿐 아니라 전 대중에게 있어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내부건 외부건 미하일 8세의 적을 더 늘릴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국력은 계속 빨아먹히는 악순환이 지속된 것이다. 요안니스 4세에게 했던 잔인한 행동은 결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와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미하일 8세가 제국을 재건한 이후 했던 행동들을 보면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짓들을 많이 했다. 당장 재정 악화만 보아도 군사 활동을 줄였으면 아나톨리아를 보전하여 충분히 극복 가능한 수준이었다. 중앙군도 전대 황제들 덕분에 충실했고 지역 방위를 위한 요새와 이를 지킬 수비군 역시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여[* 또한 미하일은 전대 황제들에 비해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우대해 주고 많은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당시 주변 세계에서 굉장히 민감한 존재로, 너무 우대해주면 '유대인 국가'라며 비판당했고 그렇다고 너무 탄압하면 또 그걸 꼬투리 삼아 역시 비판당할 정도였다. 이러한 유대인 우대정책은 미하일의 외교적인 고립에 한 몫 했다.] 사방으로 적을 만들었고 나중엔 군사활동을 줄이고 싶어도 상황 자체가 악화되어 그러지를 못했다. 멀쩡한 방어선의 자원을 유럽 수복한다고 쪽 빨아냈으니 그게 무너지는 건 당연지사. 미하일 8세가 요안니스 4세의 신변을 보장하고 군사활동을 줄이고 내정에 치중하면서 제국의 국력을 키워갔다면 후일 제국의 처참한 몰락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종교계 건도 마찬가지였다. 미하일 8세가 조금만 신중하고 더 자존심을 굽혔다면 파문 사태는 막을 수 있었고[* 당장 이에 대한 적합한 사례가 이미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의 갈등으로 인해 터진 [[카노사의 굴욕]]이다. 이때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받자 일단 교황에게 수그려서 파문을 철회한 뒤 다시금 명분과 힘을 모아 역으로 교황을 추방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완벽히 복수에 성공했다. 미하일 8세가 충분히 참고할만한 사례였음에도 미하일은 그 반대로 행동한 것이다.], 통합건 역시 외교적인 이득을 위해 섣불리 진행하다 더 큰 손해만 봤다. 주교들이 당시에는 지역민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뼈아픈 실책이었다. 얼마나 교회의 신망을 잃었는지, 사망 당시에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하고 일단 [[암매장]]했다가 나중에서야 [[이장]]할 정도였다. 그리고 [[미하일 8세]]의 이런 대책없는 정책들은 결국 재정 파탄으로 이어졌다. 미하일 8세 치하에서는 수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제국을 지키고 있었으나,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2세 치하의 제국은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군대를 대폭 축소했는데, 기록만 살펴봐도 1/5 이상으로 줄어들었으며, 해군은 아예 해체되고 제노바에 위임하였다. 덤으로 [[아나톨리아]] 지방의 상비군을 해체했다. 나중에 군사력이 지나치게 약해지고 베네치아나 카탈루냐 용병대에 제대로 데이면서 자신이 군사력을 지나치게 줄인 게 실수였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약해진 군사력을 복구하기 위한 노력을 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 무렵엔 중무장한 보병과 기병을 볼 수는 있었지만 계속되는 내전과 흑사병으로 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군사력은 줄어들고 만다. 이런 짓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는데, 라스카리스 왕조가 피땀으로 일궈놓은 아나톨리아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 속주가 다시금 중요해지면서 황제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아나톨리아 해안지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미하일 8세도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서유럽의 진격을 완전히 돈좌시킨 이후에 뒤늦게나마 아나톨리아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2세나 안드로니코스 3세도 아나톨리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아나톨리아 해안지대는 가장 방어하기 취약한 곳이었고, 옛 콤니노스 왕조 시기와 비슷하게도 룸 술탄국의 잔해 위에서 튀르크 부족들이 대거 침입하여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국방력이 와해된 제국으로서는 아나톨리아의 상실을 막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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